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랜디 존슨 (문단 편집) === [[시애틀 매리너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espngrantland.files.wordpress.com/randy-johnson-mariners-tri.jpg|width=100%]]}}} || 그러나 시애틀 이적 이후 1990시즌부터 10승 이상과 3점대 평균자책점을 꾸준히 찍어주는 준수한 투수가 되었다. 1990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고 당대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교타자 [[웨이드 보그스]]를 상대로 단일 경기에서 3K를 잡아낸 최초의 좌완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구불안은 여전해서 1990~1992 3시즌 연속 [[볼넷]]왕이라는 [[영 좋지 않은]] 타이틀을 가져가는 등 여전히 리그를 지배하는 에이스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상태였다. 1992년 7월에 8연패라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자 경기 전 상대팀의 한 투수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게 바로 '''[[놀란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은 상대팀 선수인 그를 성심성의껏 도와주었고, 라이언과 전담코치의 노력 끝에 제구력을 안정시키게 된다.[* 정작 라이언은 명예의 전당에 오른 투수들 중 제구력이 최하위권이였던 건 함정.] 놀란 라이언의 교육이 효과를 봤는지, 랜디 존슨은 이후 두 달 조금 넘는 남은 시즌 동안 3.30 ERA를 찍었고, 9월 27일 놀란 라이언과의 맞대결 경기에서는 '''MLB 최후의 160구''' 경기를 치르며 8이닝 18K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는 라이언 역시 감명을 받았는지, 훗날 랜디가 300승을 달성한 뒤 AT&T 파크에서 가진 기념식에 참석해서 연설을 하며 그날 경기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1992년 시즌이 끝났을 때, 존슨은 만 29세의 나이로 일반적인 에이징 커브에 따르면 최전성기가 지나는 시점이었고 [* 일부를 제외하면 랜디 존슨 정도의 고령에 더 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동 시대를 풍미했던 [[그렉 매덕스]], [[페드로 마르티네스]]도 만 29세 이후 성적은 그 이전과 확연하게 차이가 났을 정도이며 [[클레이튼 커쇼]]는 아예 이닝 이팅 능력이 사라지고 유리몸이 되었다. [[배리 본즈]]나 [[로저 클레멘스]] 같은 금지약물 복용 선수들을 빼고 보면 30대 기록이 20대보다 훨씬 좋은 선수는 거의 없다.] 이때까지 커리어를 살펴봐도 49승 48패 평균자책점 3.73에 BB/9가 5가 넘는 '''구위는 좋은데 제구가 불안한''' 투수의 전형이었다.[* 동 나이대 그렉 매덕스는 152승 평균자책점 3.18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132승 평균자책점 2.65 클레이튼 커쇼는 144승 평균자책점 2.45를 기록하고 사이영 상을 모두 3회 수상한 상태.] 그러나... 1992년까지 5~7개 수준의 BB/9을 기록하던 존슨은 1993년부터 커리어가 끝날 때까지 BB/9이 4개 이상인 시즌이 없다. '''제구가 잡힌 파워피쳐가 얼마나 무시무시해지는지'''를 제대로 보여준 것.[* 1993년 이후 2004년까지 랜디 존슨은 부상 시즌(1996, 2003)과 태업을 의심 받은 1998년을 제외하곤, 모조리 사이 영 투표 3위안에 드는 기염을 토한다. 이 기간 동안 사이 영 투표 순위는 1위 5번, 2위 3번, 3위 1번. 2위를 한 시즌 중 2번은 약쟁이 [[로저 클레멘스]]에게 사이 영을 빼앗겼고, 1998년 휴스턴으로 트레이드 된 이후의 존슨은 리그 최고의 피칭을 펼쳤으므로 부상을 제외하곤 적수가 없었던 셈] 라이언을 만나고나서 존슨은 제구가 안정되었지만 그해 12월 개인 훈련을 하느라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자책감에 빠진 존슨은 야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듣고(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MLB 역사에 남을 대투수로 성장하게 된다. 1993년에 255⅓이닝을 던지며 308K, 99BB,[* 이전에는 140~150개의 볼넷을 내주며 240~250개의 탈삼진을 잡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1993시즌의 기록은 존슨이 리그를 지배하는 에이스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는 매우 고무적인 성적이었다.] '''19승 8패, 3.24 ERA'''을 찍더니, 1994년에는 파업에도 불구하고 172이닝 동안 204K를 잡아 13승, 6패, 3.19 ERA로 사이영 투표 3위에 올랐다.[* 이 해 AL 사이영 상 수상자는 [[데이비드 콘]]이었다. NL 사이영 상은 [[그렉 매덕스]]의 차지. 이 시즌에 매덕스는 본인 커리어 최저 ERA인 '''1.56'''을 기록했다.][* 이 시즌 4월 11일 토론토를 상대로 2.1이닝 11실점을 했는데 이는 본인의 1경기 최다 실점 기록이다.] 이 시즌 4월 25일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로저 클레멘스]]를 상대로 2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로저는 7이닝 3실점.] 여담으로 1993년 트레이드 데드라인 때 존슨은 당시 최강팀이였던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트레이드 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당시 토론토의 GM [[팻 길릭]]은 데드라인때 토론토의 전력을 어떻게든 상승시키기 위해 안전빵으로 두개의 별도 대형 트레이드 시나리오를 동시에 진행했는데, 그 대상 중 하나는 시애틀의 존슨이였고, 다른 하나는 오클랜드의 [[리키 헨더슨]] 이였다. 길릭은 오클랜드의 GM과 먼저 대화를 하여 트레이드에 구두합의를 하였지만, 당시 헨더슨은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어서 일단 그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였다. 헨더슨이 거부할 가능성이 꽤 크다고 봤던 길릭은 안전빵으로 시애틀과도 존슨을 대상으로 네고를 하였고, 결국 시애틀과도 '''사실상 트레이드에 합의한 상태였다'''. 근데 데드라인이 되기 불과 몇시간 전에 헨더슨이 의외로 트레이드에 동의하자, 길릭은 사실 원했다면 여전히 존슨을 대신 선택할 수 있었지만 먼저 네고를 한 오클랜드 GM과의 의리를 생각하여 결국 핸더슨을 대상으로 트레이드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헨더슨이 토론토에서 그리 큰 활약을 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팀이 결국엔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던 것을 보면, 만약 존슨이 이 때 토론토로 갔다면 그의 커리어 첫 우승은 2001년보다 훨씬 전인 1993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면 이 선택은 토론토에게 큰 패착이 됐는데, 이 당시 존슨은 계약기간이 상당히 남아있었지만 헨더슨은 시즌 직후 바로 FA로 풀렸기 때문. 시즌 후 헨더슨은 토론토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클랜드로 돌아갔고, 토론토는 1994년 시즌부터 선발진이 크게 흔들려 장기간 암흑기에 들어가게 된다.] [kakaotv(396036942)] 1995년에는 파업 여파가 이어지며 시즌이 단축되었음에도 214⅓이닝 동안 294K[* 이 해 성적 덕분에 존슨은 [[놀란 라이언]] 이래 '''최초의 탈삼진왕 4연패'''를 달성하게 된다.]를 잡는 활약으로 '''18승, 2패''',[* NL의 [[그렉 매덕스]](19승 2패)와 함께 역대 최초로 200이닝 이상 승률 9할 시즌을 만들어냈다.] 2.48 ERA를 찍고 커리어 첫번째 [[사이 영 상]]을 수상한다. 더 뜻깊은 것은 이 해 시애틀은 창단 첫 지구우승을 달성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이 과정이 정말 극적인 것이, 이 때 시애틀은 8월 말까지 당시 지구 선두였던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게 10게임이나 뒤져있었다. 그러나 팀의 막판 스퍼트로 동률을 달성했고, 지구우승을 놓고 벌인 원게임 플레이오프에 3일 휴식 후 등판한 존슨은 완투승을 거두었다. 다만 이 때문에 디비전시리즈 1차전에 등판하지 못했고 시애틀은 [[뉴욕 양키스]]에게 1,2차전을 모두 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리 3일 휴식만을 취한 존슨은 3차전에서 선발승을 따내며 팀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리고 단 하루 쉬고 5차전 9회 동점 무사 1,2루 위기에서 등판해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결국 3이닝, 1실점, 6K 구원승을 거두는 '''괴물같은 활약'''으로 팀을 챔피언시리즈까지 진출시켰다. 다음 상대는 당대 최고의 핵타선이었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였는데 존슨은 인디언스를 상대로 3차전에서 비록 8회에 나온 수비에러로 인한 비자책점으로 선발승을 따내진 못하지만 8이닝, 2실점(자책1점)으로 승리에 기여했다. 그리고 2승 3패로 탈락위기에 몰린 팀을 위해 6차전 또다시 3일 휴식 후 등판하지만 타선의 침묵과 수비진의 지원을 받지 못해 7회까지 비자책 1실점만을 허용했음에도 팀은 0:1로 끌려가게 된다. 어쩔 수 없이 8회에도 등판한 존슨은 결국 시즌 말미 계속된 피로가 쌓였던 탓인지 3점을 내주게 되고 매리너스는 그대로 완봉패하며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탈락하게 된다. 하지만 양키스와의 디비전 시리즈에서 매리너스가 명승부를 펼치면서 당시 인기 저조로 연고지 이전 논란까지 있던 시애틀에 야구 열기를 불지폈고 이는 오히려 새구장 건립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1995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s-3|해당 문단]] 참조. 1996년에는 허리부상으로 일찌감치 시즌아웃이 됐지만 1년 만에 회복하고 이듬해에 복귀, 1997년에 '''213이닝 291K 20승 4패 2.28 ERA'''라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런데 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에서 '''전부 2위'''라는 트리플 '''[[콩]]'''라운을 기록. 다승과 탈삼진에서 하나 차이로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한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로저 클레멘스]]에게 사이 영 상을 내준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ALDS 1차전에서 5이닝 5실점 7피안타 3K/4BB로 망하면서 7이닝 2실점 9K/0BB의 [[마이크 무시나]]에게 패했고, 4차전에서는 8이닝 3실점 7피안타 13K/2BB로 분전했으나 7이닝 1실점 7K/3BB의 마이크 무시나에게 또 패하면서 팀도 탈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